📒 문학

대지 - 펄 벅

loose 2024. 2. 1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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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안 읽은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너무 오랜만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듯 해서 만족감을 얻었다.

 

간략한 줄거리는 왕룽이라는 주인공이 오란(玉蘭)(순수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종을 아내로 들이는 것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오란으로부터 아들을 얻고(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여자가 자식을 낳아 남자에게 준다라는 의미가 강한 당시의 중국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 이후의 죽음까지 한 남자의 일대기를 적어낸 책이다.
 
책은 1900년대 초반부터 후반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며 책 분량은 약 470p에 달했는데 난 약 200p까지 읽었을 무렵까지 기분이 언짢은 편에 속했다.
왕룽이 오란에게 너무 사람다운 대접을 하지 못했으며 애정어린 시선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에 그것은 곧 사랑이 없다고 느껴졌다.
추수기에 그녀가 일을 못 하리라는 짜증으로 인해 아래와 같은 말은 한다.
"하필이면 이런 때 또 애새끼를 낳겠다 이거지!"
-78p

 

이 문장을 보고 얼이 빠져 왕룽이 정신이 나간건가 싶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갖는 내 주관적인 가치와는 반대로 진행되는 서사가 내가 가진 인류애를 충분하게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왕룽과 오란에게 자식들이 많이 생기고 보석을 팔아 형편도 좋아졌을 무렵
에서 왕룽은 오란에게 머리에 기름칠도 좀 하고 지내라는 말을 한다.
" '내 얘긴, 다른 여자들이 그렇듯이 당신도 기름을 좀 사서 머리에 바르고 검정 옷감을 떠다 새 옷이라도 만들어 입으면 못쓰느냐 이거야. 그리고 당신이 신는 그 신발은 지주의 부인이라는 현재 당신의 신분에 맞지 않아.' "

"아내한테 부당하게 야단을 쳤다는 자책감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생각에 왕룽은 이 찻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227p
난 여기서부터 그제서야 왕룽이 뒤늦게 오란에게 느끼는 아낌의 감정을 보여주리라고 예상했는데, 그걸 처참히 무시하듯이 231p 이후부터 
왕룽은 나태해진 삶을 탈출하고자 창녀인 롄화에게 돈을 쏟아붓고 기어코는 롄화를 집으로 들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오란은 두번 슬픈 감정을 보였다.
첫번째는 롄화를 사려고 아내가 갖고 있던 진주 2개를 빼앗았을 때다. 
여기서 오란은 슬픈 감정으로 빨랫방망이를 두들겼다는 부분에서 더 이상 책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저미었다.
"오란은 다시 옷을 두들기기 시작했고 눈에서 천천히 무겁게 눈물이 흘러내렸어도 그녀는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내지 않았고, 돌멩이 위에 깔린 옷을 나무 방망이로 더욱 줄기차게 두들길 따름이었다."
그 진주는 훗날 딸들이 결혼을 할 때 귀고리를 해주려는 목적이었다.
두 번째는 왕룽이 롄화를 집에 들이고 나서다. 
굶주림으로 힘든 시절에도 울지 않았던 오란이 눈물을 보이며 크게 울었다고 적혀있다.
 
책 후반부 오란이 몸이 성하지 않아 죽을 시기가 다가왔을 때 왕룽은 모든 돈을 다 써서라도 오란을 살리고자 한다.
하지만 죽음은 불가항력의 힘이기에 그 이후의 내용은 '후회'이지 않을까 했는데 이 역시 독자인 나를 갖고 놀기라도 한다는 듯이 왕룽의 주위로부터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시금 생경하게 적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책 말미에는 무덤을 바라보며 "글쎄, 다음은 내 차례로구나"하는 것이 전부다!
 
또 '후회'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중 하나는 전쟁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들을 회유하고자 어린 계집종을 고르라고 했으나 자신이 좋아하고 있던 어린 계집종인 리화의 이야기가 아들의 입에서 나오자 오히려 아들에게 질투하고 결국에 70세로 지쳐가는 왕룽 본인이 리화를 안게되는 장면이 쓰여 있다.
왕룽 " '아니다, 아냐. 우린 너를 결혼시키지 않겠다. 하지만 내 얘긴, 혹시 네가 원하는 계집종이라도 있으면......' "

아들 " '저는 관심도 없는 일이지만, 혹시 관심이 있다고 해도, 글쎄요. 안채에서 시중을 드는 피부가 하얗고 어린 종(리화)이 외에는 이 집엔 예쁜 아이가 하나도 없어요.' "

"그러자 왕룽은 아들이 리화를 두고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이상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은 두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447p
" '하녀는 아들에게 주는 것이 좋을 거야' 그리고 그는 거듭거듭 자신에게 이 말을 했으며, 그 말을 할 때 마다 벌써부터 살이 쓰라리게 쑤셔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450p
 
위의 내용에서 왕룽에 대한 미화나 비난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독자로 하여금 한 인물의 나약함과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도 그럴게 오란, 롄화, 리화를 각각 안는 장면은 여과 없이 마치 독자가 그 현장을 훔쳐보기라도 하는 것을 원하는지 생동감있게 서술해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이 더 빨리 읽히기도 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러한 표현들은 독자가 보편적인 미덕을 더 깊게 고찰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로 보인다.
 
결국에 책은 아들들이 미소를 지으며 왕룽이 마지막까지 사랑하던 대지를 앗아가며 책은 끝난다.

 

옮긴이는 "영구한 요소들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성이 빚어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말로부터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약 200p 까지 읽었을 때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현재 영구한 요소들에 의해 빚어진 나라는 존재로부터 생겨난 사랑이 아닐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은 말 그대로 혹독함이었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추구해야만 하는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왕룽은 대지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빚어지는 한 사람의 일대기를 내가 사랑이 전혀 없었다고 재단하는 것은 부끄러움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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