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섯 개, 강력 추천.
3시간 만에 전부 읽어버렸다.
문장 자체가 술술 읽히도록 쓰여 있다. 표현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고, 장면마다 초록과 파랑, 검정의 색으로 가득 찬 배경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내용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한 명 한 명을 작가가 직접 살아본 것처럼 이입해 표현해 냈다는 것이다. 그 문장들에 여러 번 감탄했고, 책을 읽다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사랑의 모양
이 책을 읽고 가장 오래 여운이 남았던 주제는 ‘사랑의 모양’이었다.
책의 주인공 도담의 시선에서 표현된 사랑을 먼저 살펴보고 싶다.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서로를 의지한다는 건 함께 가라앉는 것 같았기에.
도담은 더 이상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191p)
도담은 그날 이후 자기 감정을 의심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누군가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끼면 강하게 의심했고, 행복을 느끼면 자신이 겪게 될 낙차를 두려워했다. (253p)
오직 사랑만이 최고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랑은 종교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사랑만이 답이라는 허술한 교리를 가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겠지. 도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136p)
도담은 원래 냉소적인 인물이지만 학창 시절 해솔과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성인이 된 도담에게 사랑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의심했고 행복해지는 만큼 다가올 낙차를 먼저 떠올렸다.
그것이 도담의 사랑이라면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의 사랑이 여러 다른 모양으로 등장한다.
책을 덮고 나서 시시각각 변하던 사랑의 모양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한동안 난해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사랑
나를 지키기 위한 사랑
말하지 않는 사랑과 말하는 사랑
참는 사랑
현실적인 사랑
감정만 불타는 사랑
생각과 감정이 불일치하는 사랑
헌신적인 사랑과 헌신하지 않는 사랑
책을 읽은 독자라면 각각의 사랑이 어떤 장면이었는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한 권의 책 안에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낙차가 가장 컸던 도담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도담은 가장 격정적으로 사랑했고 또 가장 차가워졌다.
도담은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쉽게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감정 소모를 하거나 상대의 기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결국 상대방보다는 현실의 자신을 선택한다. 물론 그것도 자신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도담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상처받은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감정을 책임지지 않는 관계였다.
서로의 깊은 상처만을 방치한 채, 서로의 외로움을 유지한 채, 현실만을 바라보고 서로를 돌보지 않는 상태로 이어지는 사랑이었다.
도담의 사랑이 무거운 현실 속에서 감정을 절제하는 형태라면, 그와 반대되는 사랑이라면 어떨까
현실을 잊기 위해 낭만에 기대는 사랑이다.
서로만 보고 그 이외의 것은 무시하는 두 사람이 만나면 당연히 현실은 무너질 것이다.
책의 주인공들이 20대 초반 시절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사랑의 형태들은 개인에 가치관에 따라 나빠보이기도 하지만 좋아보이기도 한다.
나 자신을 선택하자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낭만적인 사랑이 좋아보이지 않겠고, 낭만적인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선택한 사람이 좋아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렇듯 어떠한 사랑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정답처럼 보이면서 정답처럼 보이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졌다.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이 만날 때,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같은 사람이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여야 할까.
아니면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걸까.
겸손함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능력이자 의식적인 결단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안전한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선택하는 의지이자 노력이다.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의 모양이 있고, 그에 대한 고집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가치관과 본능을 그대로 따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본능을 거스르는 선택들이 쌓여 하나의 사랑이 된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나를 먼저 챙기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더라도 상대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는 것, 혹은 상대에게만 몰두하다가도 미래를 위해 잠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것.
“나는 원래 이래”라고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
상대방의 사랑의 모양을 존중하고, 내 세계에 그 사람의 자리를 조금씩 확장해 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첫걸음이 아닐까.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랑은 각기 다른 수영법을 배우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수영, 상대방만을 사랑하는 수영, 소용돌이에 빠졌을 때 빠져나오는 법까지.
살다보면 하나의 수영법만 잘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누군가와 손을 잡고 함께 수영하는 일은 훨씬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추구해 온 사랑의 방식을 굽히는 일도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럼에도 돌고래 두 마리가 나란히 헤엄치며 물살에 대한 저항을 줄이고 서로를 보호하며 앞으로 빨리 나아가듯, 처음엔 어렵더라도 사랑 또한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 다른 사랑의 가치관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진 사랑의 가치관에 대한 겸손.
그리고 도담과 해솔이 추상적이고 안전하지 않은 미래를 선택하면서도 같이 헤엄치려 하는 용기를 얻었던 것은 그간 충분히 사랑에 대한 여러 안전한 수영법을 배웠고 준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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